묘소를 답사하다보면 안장된 이의 신분과 사적을 알리는 비석을 흔히 보게 된다. 대개 누구누구 지묘(之墓)라고 적혀있다. 실제 주인공이 그곳에 묻혀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끔 누구누구 지단(之壇)이라 적혀있는 비석도 볼 수 있다. 이는 유골이나 묘를 잃어버려 주인공이 그곳에 매장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실전(失傳)한 묘지의 비석에 붙이는 이름이 단(壇)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왕이 된 후에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족보인 선원보(璿源譜)를 만들기 위해서 그의 22대조이며 시조인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의 묘를 찾았다. 전주(全州)의 건지산(100.5m)기슭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고 많은 지사들과 사람들을 동원했으나 끝내 찾지못했다. 이후 시조묘를 찾기 위한 노력은 역대 왕들도 계속하였다. 영조는 묘지를 찾지 못하자 유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영조 47년(1771년) 시조 이한과 그의 비인 경주김씨의 위패를 봉안하는 사당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경기전(慶基殿) 경내에 건립하였다. 경기전은 전주의 주산인 기린봉(306m) 아래에 있으며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태종 10년(1410년)에 창건한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조선말 서기 1899년 어느날 우연히 전주시 덕진구 건지산 근처에서 나무를 하던 나무꾼의 갈퀴에 이상한 돌 하나가 걸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예사 돌이 아니다 깨달은 나무꾼은 그 자리에 표시를 해놓고 그 길로 현감에게 가지고 가 아뢰었다. 현감이 보니 이것은 왕실에서 그토록 애타게 찾던 전주이씨 시조 이한의 묘의 지석(誌石)이었다.
지석이란 묘지석이라고도 불리며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생전의 전기, 무덤의 소재 등을 돌에 기록하여 관과 함께 봉분 속에 묻는 것을 말한다. 묘 앞 비석에도 이러한 사항을 기록해 두지만 세월이 오래 지나면 비바람에 훼손되고 망실되어 버린다. 혹시나 후손들이 조상묘를 찾지 못하는 경우를 대비해서 지석을 묻었던 것이다. 지석의 중요성은 실로 대단해서 역사학적인 가치가 높다.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덤 조성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알 수 있다. 공주의 백제 무녕왕릉은 지석문이 나와서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또한 당시의 역사적인 실체를 명확하게 복원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야의 고분들이나 신라왕릉들은 이 지석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많은 무덤의 주인공들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이다.
조경단의 지석(誌石)
현재 전라북도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조경단 재실에 보관되어 있는데 '천보십삼재구척하(天寶十三載九尺下)'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제35대 경덕왕 13년(754년)으로 추정된다. 천보는 당나라 현종의 연호다. 이 지석에는 후손 춘옥(春玉)이가 캐고 이 글을 곤옥(崑玉)이가 해석하리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과연 천여년이 지난 후에 정말 춘옥이가 캐고 곤옥이가 이 돌이 사공공묘의 지석임을 해석하였다고 한다. 지석문은 다음과 같다.
현감은 즉시 한양으로 달려가 보고했다. 시조묘를 애타게 찾던 왕실은 기뻤다. 그러나 어느 곳이 정확한 묘인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지석이 발견된 능선 주변 남북 3520척의 경내의 다른 묘소를 모두 없애고 단(壇)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주변 어디에는 분명 시조묘가 있으므로 경내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시조묘를 후손이나 타인들이 밟고 다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에 대한 『고종실록』을 살펴 보면 광무 3년(1899년) 1월 25일, "전주의 건지산(乾止山)에 제단을 쌓고 비석을 세우며 관리를 두는 등 문제는 전부 종정원(宗正院)의 의견대로 집행하며 제단 이름은 조경단(肇慶壇)이라 부르고 수봉관(守奉官) 2명은 일가 중에서 특별히 둘 것이다. 비석 앞면의 글은 내가 직접 써서 내려보낼 것이니 뒷면의 글은 전 대학사(大學士)가 지어 바치도록 할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같은 해 3월 11일 궁중내부 특진관인 조경단심재신(肇慶壇審宰臣) 이재곤(李載崑)이 전주에 와서 건지산 묘소 검분(檢分)이 실시되었다. 설단(設壇), 수비(竪備), 건재(建齋)의 후보지는 따로 지관이 정하기로 했다. 동시에 창경 토지나 단의 좌우계곡에 건립된 접단을 본단 수봉궁(守奉宮)에 속하게 할 것을 제언하고 마침내 고종어필의 전제(篆題)와 찬문(撰文)으로 대한조경단비 건립이 준비되었다. 6월 21일 궁내부대신의 대리 민영기(閔泳琦)는 회계원 검사과장 오현기(吳顯耆)와 흥덕군수 오응선(吳應善)을 특별감독으로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들은 장인(匠人)과 공인(工人)들을 잘 정비하여 수일내에 대한조경단을 준공하게 되었다. 7월 11일 고종은 시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조경단(肇慶壇)과 묘지인 조경묘(肇慶墓),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경기전(慶基殿)의 관리를 맡을 제조(提調)는 해당 도(道)의 관찰사로 겸임시킨다는 어명을 내렸다. 그리고 해마다 한 차례의 제사를 봉행하도록 하였다. 이는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의의를 한층 높이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조경단(肇慶壇)의 '조(肇)'란 '시작하다', '경(慶)'은 '경사스럽다'란 뜻으로 '국경(國慶)의 시초'란 의미라 할 수 있다.
풍수로 본 조경단
호남정맥 만덕산에서 기린봉을 거쳐 건지산으로 내려온 용맥... 전주의 주산은 기린봉이다. 백두산에서부터 뻗어 내려온 백두대간이 장수군 백운산에서 장계면 무령고개로 뻗은 산맥이 금남호남정맥이다. 장수의 장안산, 사두봉, 신무산을 거쳐 진안의 팔공산, 성수산, 마이산, 부귀산을 만들고 진안군과 완주군의 경계를 이루는 모래재고개에서 두 산맥으로 갈린다. 북쪽 운장산과 대둔산,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금남정맥이고, 남쪽 곰치재를 넘어 만덕산, 박외뫼산, 옥녀봉, 경각산, 오봉산, 내장산, 추월산, 무등산, 조계산을 거쳐 광양 백운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가 호남정맥이다. 전주시 대부분 지역은 호남정맥 만덕산(763.3m)을 태조산(太祖山)으로 한다. 모악산(793.5m)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구이저수지가 있는 삼천(三川)과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만덕산과 경각산(659.3m), 모악산 세 영역으로 구분된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하므로 물줄기를 보고 산줄기를 파악한다. 모악산 줄기로는 삼천 서쪽 전주박물관과 전주대학교, 전주산업단지, 월드컵경기장 등 주로 새로 개발된 지역이 이 맥을 받아 형성되었다. 경각산 줄기로는 삼천 동쪽, 전주천 서쪽 지역으로 완산구청과 기전여자대학, 완산구청, 효자동, 서신동 일대다. 만덕산 줄기는 전주천 동쪽, 아주천 서쪽에 위치하며 전북도청, 전북시청, 풍남문, 전주향교, 경기전, 조경묘, 전북대학교 등이 있는 기존 시가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곳 조경단도 만덕산 줄기의 맥을 받는 곳이다. 만덕산에서 갈라져 나온 한 산줄기가 은내봉(452m)과 묵방산을 세우니 전주의 중조산(中祖山)들이다. 숯재를 지난 산줄기가 크게 방향전환을 하여 아담한 산을 만든다. 바로 전주의 주산인 기린봉(306m)이다. 이 기린봉 아래에 풍남문을 비롯한 경기전, 조경묘, 오목대, 전주향교 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기린봉에서 중앙여고쪽으로 뻗은 야트막한 능선은 인후동과 우아동 일대를 가로지른다. 그리고 백제광장을 지나 전북대학교 뒷산을 만드니 이 일대의 주산이라 할 수 있다. 이산에서 좌측으로 개장한 능선은 전북대학교쪽으로 내려가 청룡을 이룬다. 진행방향으로 계속 가던 산줄기는 전주동물원 뒤를 돌아 드림랜드 뒤로 방향전환을 한다. 그리고 건지산(100.5m)을 만드니 이곳 조경단의 백호자락이다. 주산 중심에서 갈라져 나온 한 맥이 크게 과협하고 굴곡으로 변화하여 작고 야트막한 현무봉을 세운다. 이 봉우리 아래 언덕 모두가 조경단 경내인 것이다. 이곳 어딘가에 시조 이한의 유골이 묻혀있다고 보고 1만여평에 이르는 경내 주변에 담을 쌓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하였다. 시조가 누워있는 땅을 함부로 밟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제사를 모시는 단은 언덕 아래에 돌담을 쌓고 동서남북에 문을 냈다. 그러나 이 단이 혈은 아니다.
기세 장엄한 양룡합기혈(兩龍合氣穴)...
현무봉 아래에서 내려오는 용맥 중턱에 가묘를 하나 만들어 놓았는데 이 역시 정혈이 아니다. 혈은 그 아래 능선이 끝나는 곳에 있다. 현무봉에서 가묘를 거쳐 이곳까지 연결된 용맥은 마치 근육질의 팔뚝처럼 울퉁불퉁하다. 그만큼 변화가 많고 기세가 있다는 뜻이다. 좌측 청룡쪽으로도 한 맥이 내려오는데 그 기운이 대단하다. 그 끝나는 지점 역시 기가 뭉쳐있으니 혈이 되겠다. 그런데 좌측으로 내려오는 맥이 끝부분에서 일부가 가운데 맥으로 연결된다. 참으로 보기 드문 형상이다. 이처럼 두 개의 용맥이 하나로 합하여 혈을 맺는 것을 양룡합기혈(兩龍合氣穴)이라고 한다. 용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혈을 맺기 때문에 매우 귀하다. 옛 문헌에서는 이러한 곳의 혈을 괴교혈(怪巧穴)이라고 한다. 혈이 기이하고 교묘하여 일반적인 것과는 다른 것으로 대개 천장지비(天藏地秘)한다고 한다. 즉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기고 있다가 공덕이 있는 사람에게만 보여준다는 혈인 것이다. 괴교혈은 주로 대혈이 많으며 대대손손 자손이 번창하고 부귀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전 김대중대통령의 하의도 선영이 양룡합기혈에 자리 잡았다한다. 따라서 대단한 용맥에 대단한 혈인 이곳에 당연히 전주이씨 시조의 유골이 묻혀있으며 한 왕조가 탄생한 것은 이러한 산천정기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청룡백호가 겹겹으로 감싸주고 명당은 평탄 원만하며 수구는 좁게 관쇄...
이곳에서 좌측으로 보이는 청룡은 겹겹으로 감싸주고 있다. 전북대학교 의대와 농대가 있는 능선으로 모두 이곳을 향해 있다. 산세는 높지도 낮지도 않으며 수려하고 유정하다. 백호는 드림랜드와 어린이회관이 있는 능선들로 겹겹을 이곳을 감싸고 있다. 이 중 제일 높은 봉우리가 건지산으로 귀인의 형상이다. 이들 청룡백호가 서로 교차한 곳이 수구인데 완벽하게 닫혀 있어 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없을 정도이다. 수구가 자물쇠로 잠군 것처럼 좁게 관쇄(關鎖)되어야 보국(保局)이 형성되고 기가 안정된다. 또 물은 재물을 관장한다했으므로 재산이 모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지리중에서 제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수구라고 하였던 것이다. 청룡백호가 양팔을 벌리듯 감싸주면 그 안쪽 공간에 생기는 들판이 명당이다. 이 명당은 평탄하고 원만하여야 좋다. 이곳은 물이 어디로 흐르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평탄하고 원만하다. 이 명당으로 주변의 모든 물들이 모인 다음 좁은 수구를 빠져나가 덕진연못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다시 전주천으로 합류하여 만경강으로 흘러간다. 혈처로 추정되는 곳에서 보면 물은 좌측에서 나와 우측으로 흘러가는 좌수도우(左水倒右)이다. 수구의 방위를 측정하면 정미(丁未)이므로 자좌오향(子座午向)이나, 임좌병향(壬座丙向)으로 남향을 하면 부귀왕정한다는 자왕향(自旺向)에 해당된다. 형기와 이기가 모두 잘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